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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두 칼럼>역설의 반란

마일두 목사(교회 리더연구소 소장)

  • 김상현 편집장 shkim7790@daum.net
  • 입력 2017.01.25 22:59
  • 수정 2017.01.2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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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일두 목사(교회 리더 연구소 소장)

어느 나라에 법을 잘 지키는 왕이 있었다. 왕은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눈을 빼버리겠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왕자가 법을 어긴 것이다. 왕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왕자의 눈을 뺄 것인가, 왕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어길 것인가?’하는 딜레마에 처했다. 그런 왕을 백성들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고 있다. 당신이 왕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신경경제학 교수 ‘그레고리 번스’가 쓴 <상식파괴자>라는 책이 있다. 그가 말하는 상식파괴자는 사물의 본질을 명료하게 꿰뚫어 보고, 익숙한 관습을 타파하고, 창의적인 혁신을 구현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회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득시키고, 남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상식파괴자다. 예수님 외에 누가 이 모든 사항에 해당할 만큼 완전히 상식을 파괴한 자가 있었겠는가. 예수님의 위대함은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후 아담과 하와에게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위임해주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하자 인류와 우주만물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에게서 마귀에게로 넘어가버렸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눅 4:5-7)

 

소유권을 확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강제로 빼앗는 것과 법대로 값을 지불하고 공정하게 되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물주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귀로부터 소유권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그런데 적법하게 소유권을 되찾으려면 복잡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인류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러야 한다. 문제는 죄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구원자는 왕이며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여야 한다. 왕이어야 이 세상 임금인 마귀를 쫓아내고, 완전한 제사장이어야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으며, 선지자여야 성경의 예언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가난과 질병과 저주도 정복해야 한다. 넷째, 구원에 대한 전략을 택한 자는 알지만 마귀와 멸망하기로 예정된 자들은 몰라야 한다. 마귀가 알면 막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해서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게 하시므로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낸다는 계획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과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고 예언했다. 요한복음은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고 예수님이 선지자 되심을 증언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왕이요 대제사장(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이자 선지자가 되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전략이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시대에 율법의 정신은 기득권층의 자기 의와 탐욕으로 인해 변질되어 있었다. 안식일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향해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13:14).”고 말한 것이 그 증거들 중 하나다.

불의를 보편적인 진리인양 치부하는 자들과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략으로 어떻게 다른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인가? 예수님은 인류 구원과 완전한 승리를 얻기 위해 역설을 택하셨다. 역설은 보편적인 사실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진리를 쉽고 명확하게 가르치시기 위한 방법으로 ‘비유를 통한 새로운 해석’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 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 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막 4:10-12)

 

역설(paradox)에는 반드시 긴장이 존재한다. 전통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때 받게 되는 강력한 저항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의 전통은 진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힘없고 소외된 자들은 좋아했지만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가 정치나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으로 백성을 구원한다는 역설은 제자들도, 예수님을 죽이려던 사람들도, 마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왕은 법을 어긴 왕자를 어떻게 했을까? 왕자의 눈 하나와 왕 자신의 눈 하나를 빼게 하므로 법도 사랑도 지켰다. 성삼위 하나님도 이 방법을 택하셨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모든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주셨다. 따라서 십자가는 최고의 역설이다. 역설이 재미있는 것은 반전이 따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역설은 반란이 아니라 자기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실상은 역설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십자가의 역설은 우리에게도 자아포기를 요청한다.

 

광해가 영화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광해에 나오는 왕 중 진짜는 누구일까? 반정을 도모하려는 자들에게서 피신해 있는 악한 왕일까? 잠시 대역으로 앉아 있는 선한 왕일까? 역설의 반란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

 

<마일두 목사>

영남신학대학교, 동 신대원 졸

계명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전공(M.A)

칼국수 스토리(수필) 저자

물방울 콘테스트(동화) 저자

CTS, CBS, 극동방송 외 28개 방송국 출연

평신도 훈련과정 교회 리더 위크삽 개발

교사, 제직, 구역장, 청년 세미나 강사

WWW.교회리더연구소.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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