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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크리스챤스

“성도들이여! 어디로 가십니까?”

  • 김상현 대표 shkim7790@daum.net
  • 입력 2014.12.12 15:07
  • 수정 2014.12.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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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유화 장로(대구서문교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은 절대 절명의 순간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질문으로 인해 기독교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로의 폭압으로 인해 고통 받는 신도들을 버리고 피신하는 베드로에게 복음의 천명을 깨닫는 계기가 된, 위의 질문을 “쿼바디스 유니버시타스?”로 바꾸어 본다.

 왜냐하면 그만큼 현재 우리나라 대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에서이다. “대학들이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대학의 생존을 위한 비장한 질문이기도 하다』

 

 위의 글은 2007년 3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서 발간되는 “대학교육”이라는 간행물에 당시 원광대학교 나용호 총장님께서 쓰신 권두언 서두의 글이다. 원광대학교는 불교재단의 대학교이다. 불교재단의 대학교 총장님께서 엘리트들이 읽는 “대학교육”이라는 책자의 권두언을 쓰시면서 기독교의 획기적인 사건의 한 대목인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인용하여 “쿼바디스 유니버시타스? (대학들이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것은 그 분의 신념이 기독교의 대전환점은 로마에서 피신 나온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 “쿼바디스 도미네?” 이 질문에 주님께서 “로마로 간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죽음의 로마로 리턴(Return)한 것에서 이루어졌다는데 확신을 두고 있다.

 순교, 박해, 고난, 핍박, 감금, 고통, 이러한 용어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사회적으로도 접근하기 용이하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들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간다. 이 용어와 복음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지나온 세월을 보면 죽음의 고통 속에서 순수 복음의 소유자는 복음의 진가를 나타내기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이 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속에 잠재해 있는 복음의 빛을 나타내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이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의 삶을 좌우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겠는가?

 100여년 전에 어둠의 조선 땅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찾아온 미국의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 박해 ,핍박, 고통속에서 그들은 이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의 대가는 지금 이 땅에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여기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복음 때문에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맞이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순간 베드로처럼 목숨을 걸고 리턴하듯이 순수한 복음의 빛을 나타내 본 적이 있는가?

 베드로는 주님께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질문을 했지만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쿼바디스 크리스챤스?(성도들이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주님을 다시 로마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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